김무스
영화가 끝나고 글을 쓰기 전. 노트북 앞에 앉아 영화 초반 5분경에 사울이 봤던 시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재고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은 평소 지하철이나 거리 안에서 수없이 마주 보았던 그 얼굴들 같이 비쳤는데 그려지지 않는 시선, 닿지 않는 거리가, 한 공간 안에서 다른 도착지로 가는 사이와 사이를 분리 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그들의 걸음 소리인 동시에 속삭임 자체로 머릿속에 기억되었다. 이것은 영화 사울의 아들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하지 않으면서, 그 작은 진동을 상상하게끔 들려주는 방식이지 않았을까. 바닥을 닦는 솔 소리, 용광로의 불타는 소리, 사방의 총소리 등등은 영화가 감추려고 하지 않는 기억이 느끼게 하는 것에 대한 흐릿한 질문을 만들어냈다. 그 감각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만들어진 기억도 우린 어떻게 기억하게 될 것인지를 살펴보게 된다. 이것은 앞으로 경험하지 않은 기억이 가지고 있는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 너머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좋은 예시로 남겨진다.
존더코만도는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수감자처럼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사회 위계 안에 감춰진 많은 모순적인 지점들과 비슷하게 바라볼 수 있다. 자신들도 언젠가는 나체로 벗겨질 것을 알면서도 그 간접적인 죽음 앞에 선 이들은, 그 반복들(청소 혹은 그들의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 흐릿해진 화면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된 것처럼, 이들에게도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 고통을 참지 못했던 이는 이미 자살하거나, 말소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엄연하게도 그 통제를 따라야 했지만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 반복을 멈춰서는 안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체제와 굴복 안에서 중간(회색)의 형태는 마치 흐릿하면서도 없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이 가야 될 공간은 앞과 뒤가 아닌 그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그곳은 타의적인 침묵으로 유랑하는 줄기이다. 이는 수 없이 반복적이고 수동적인 일을 하며 자신들을 흐릿하게 하는 행위로, 자신들이 견뎌내야 하는 앞으로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으며 결국 그들은 더 죽어 있고 어렵게 살아있다.
영화의 4:3 비율이 가진, 강조시키고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는 극심한 불안함의 정동을 느끼게 하며 영화 안에서 개인을 넘어 홀로코스트라는 고통스러운 사건을 다시 한번 드러내고 그렇게 우리는 기억을 재현하는 공포를 인식하게 된다. 전체적인 시점의 불완전한 초점은(아웃포커싱), 관객 스스로와 스크린 사이의 경계를 만들고 이전에 있던 하나의 공간에서 벗어나 관람자 개인의 사적인 공간으로 데려간다, 더불어 흐릿한 어깨너머의 피사체는 무엇이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보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담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서 상상해 보게 된다. 그들의 등 뒤에 있는 빨간 x 자는 카메라 안에 잡힌 초점 부분처럼 보이기도 하고, 교회 위에 걸려있는 십자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점 이외에 맞지 않는 상과 뒤집힌 십자가 모양은 그들이 믿어야 할 신은 이미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이들과 그들 안에서조차,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대상으로 느껴진다.
또한 카메라 안의 초점은 쫓아야 할 대상, 즉 저격하고 있는 피사체로 보이는데
그것은 영화 초반, 사울의 등 뒤를 찍으며 그 주위를 흐릿하게 하게 보여주고 있고
후반부에는 초점이 맞게 되는 피사체들이 점차 늘어나는데 이것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또 다른 사울들을 드러낸다. 그렇게 화면 안에서 이미지가 감추고 있던 잊힌 이들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져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