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엄
왈라드 라드는 레바논의 내전과 레바논의 복잡하고 불확실하고 역사적 실상을 허구적 서사와 아카이브로 담아낸다. 그가 만들어내는 내러티브는 픽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러티브를 보면서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접한 무수히 많은 레바논과 관련된 혹은 그 사건과 닮아 있는 이미지들이 그의 내러티브를 진짜라고 믿을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허구의 내러티브인 것이 관객에게 드러날지라도 관객은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받아드릴 뿐이다. 거짓말을 통해 관객이 마주하는 역사적 배반감과 아이러니 역시 하나의 태도가 되며, 관객을 여전히 역사 속 진실로 견인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반복과 확장, 상호성과 가상성에 기반하는 디지털 기술-이미지들은 작가가 만들어낸 조작된 기억들을 무한한 데이터에 편입 시킴으로써, 허구를 그럴듯한 것으로, 소통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작가가 만들어 낸 내러티브는 어쩌면 무한한 데이터에 기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건의 원인은 아득히 먼 어느 시점에 있는지도 모르며, 왈리드 라드의 작품들은 통념의 역사를 부정하고 작품의 주체인 작가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거대한 농담처럼 비친다.

Hostage : The Bachar Tapes(#17 and #31), Atlas Group(1989-2004)
그는 아틀라스 그룹을 창설하여 레바논이라는 국가, 장소에 대한 아카이브를 진행한다. 가공의 인물(역사학자, 사진작가, 조류학자, 군사 기술자, 전쟁 피해자 등)을 만들어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기록물을 만들어 낸다. <인질 : 바차르 테잎(#17, #31)>과 작품은 사실과 흡사 하도록 정교하게 제작된 픽션이다. <솔직히 말해서 날씨가 다했다>는 레바논 내전 이후 총탄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추상적으로 변환된 이미지이다. 작품 속 사진들에 실제로 총알 자국이 남아있는 지는 알 수 없다. 작가는 색깔이 있는 스티커를 통해 마치 흔적이 남아있지만 교묘하게 가려 놓은 것처럼 이미지를 구성한다. <노트 72>, <그들은 집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는 사회적인 사건과 관련된 인물(역사학자와 군사 기술자)에 일상적인 사실(‘레바논의 역사학자들은 도박을 즐겼다.’, ‘군사 법의학자의 통찰은 학문적이기 보다는 동양풍의 카펫을 수집하는 열정에서 비롯되었다.’)이 덮어씌워지며 콜라주와 같은 형태의 이미지가 된다. 이처럼 실제 사실에서부터 출발하여 가공된 이미지들은 실제 사건과 아주 흡사하기도 다소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내러티브와 그 이미지는 여전히 레바논과 국가가 지닌 역사 속으로 우리는 데려다 놓는다. 역사는 단지 기록으로 가장해 나타나는 형식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기록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역사를 드러낼 수 있느냐 없느냐,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담론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기록이 있음’으로부터도 진실과 멀어질 수도 있고, ‘기록이 없음’이라는 그 공백과 흐릿함이 만들어 내는 추상성이 우리를 다시 진실로 데려갈 수 있는 상상력과 가능성을 열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Let's be honest, the weather helped, Atlas Group(1989-2004)
왈리드 라드의 작품이 현실 세계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세계는 현실과 허구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귄터 안터스가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만들어진 상황의 고유한 특징은 존재론적 모호성이다.” 라 말한 것과 같이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연결된 하나의 세계가, 그 제 3의 세계는 허구 또는 현실, 모사 또는 실재 가운데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범람한 데이터에서부터 파생된 세계는 이러한 이분법 안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한 매트릭스 세계이다. 귄터 안더스는 이를 ‘구조적 기만’이라 칭하여 이것이 이미지 내려진 판단에 의존하게 만들거나 의존성을 간파할 가능성 마저 빼앗아버린다고 비판하였지만, 텔레비전 이후 수많은 미디어 매체와 플랫폼이 등장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모호성을 기만으로 단정 짓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빨간약을 먹고 깨어나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매트릭스가 아니라 다양한 세계가 중첩된 채 독립적이면서도 상호작용하는 멀티버스로 이해 하는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저항의 태도는 투쟁을 통해 은폐된 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 뿐만이 아니라 흩어져 숨어버린 파편을 주워담아 가볍고 우스꽝스럽게 짜깁기하는 유머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Note Volume 72, Atlas Group(1989-2004)

They thought they would be safer at home, Atlas Group(1989-2004)